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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그 인연의 갈림길 [74]

시리우스

주소복사 조회 1338 18.12.28 09:35 신고신고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 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였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번씩 출강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피천득님의 인연 첫 구절--

 

 

 

뜬금없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서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녀와 통화를 한지도 벌써 10 여년이 지났지만 어제나 그제쯤 송년회에서 만난 동창생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뒤미처 안부를 묻는 일처럼 무척 덤덤하기만 하였다.

 

30 여년 전의 일이라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내 가슴이 쿵쾅거릴 일이었지만 이성으로서 그녀와의 인연은 이십대 중반에 봉인이 되었었고 키스는 커녕 단지 손만 몇번 잡았던 그녀이었기에 어쩌다 한번씩 서로가 사는 모습 정도는 확인하면서, 첫사랑보다는 오히려 고향집에 두고온 여동생쯤으로 남겨져 있던 그녀였다.

 

카톡에 있는 수많은 사진은 그녀를 빼어 닮은 늘름한 두 아들과, 어딘지 처연한 표정의 중년의 여인이 있을뿐 남편의 사진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정 엄마에게 복잡한 일이 있어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목적임에도 그녀 자신이 나타나지 않고 여동생을 보내는 이유가 현재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여성 특유의 자존감 때문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흔쾌히 승락을 하고서,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친정 엄마가 거주하는 y읍으로 향하였다.

 

 

 

JP처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는 외유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퇴학을 당하고 내려온 K시에서 나를 반기는 이들은 몹시 드물었다.

나와 가까이하게 되면 자칫 빨갱이로 몰리거나 요시찰 인물이 될게 뻔하니 매우 가까웠던 친구와 지인 몇 명을 제외하고는 나와의 접촉을 불편해하는 외톨이 신세가 되었다.

 

이미 별을 단 경험이 있는 선배들과 어울려 환담을 나누거나 불로동 다리를 건너편 사직공원 아래 그림을 그리던 형의 화실에 틀어박혀 암중모색을 하던 차에 독두장군이 지시한 녹화사업이 시작되어서 조만간 징집 대상이 될것 같다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을 하였다.

그래 더 늦기 전에 고향에 다녀오자~~

 

버스를 탈까 하다가 잠시 고민하다가 국민학교때 쌀 한 말을 매고 유학을 떠나올 때의 추억을 되살릴 겸 기차를 탔다.

이른 새벽 광주리에 나물을 이고 올라와 팔고 돌아가는 아낙네들의 웅성거림부터, 인근 소읍에서 K시로 통학하는 중고교생들의 하하호호하는 소리가 가득한 기차안에서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리던 중 저만큼에서 차창을 바라보며 앉은 어여쁜 여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한눈에 빠지게 되는 첫사랑이란 이런 느낌일까?  웨이브진 머리칼 뒤로 드러난 목선이 유난히 뽀얗기도 했지만 이태리 여자처럼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는 단박에 내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불과 얼마전까지 돌맹이를 집어 들며 독재정권에 항거하던,여학생들과의 미팅조차 부르조아들의 사치로 여겼던 나라는 인간은 도데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이쁜 여자가 널려 있는 서울에서도 단 한번 느끼지 못했던 복잡하게 끓어오르는 이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 단테라는 사나이의 심경도 이랬을꺼라는 상상도 잠시,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상상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난 지금 저 여자를 오늘 처음 만났을뿐이고 아니 게다가 먼발치에서 쳐다본게 전부인데,,,, 그리고 이제 내가 내릴 정거장이 몇 남지 않았는데도 이런 상상을 하는 난 뭐란 말인가?

 

 

어이없는 내 모습에 실소를 머금으려는 찰나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휴가를 나온 듯한 해병대원 한명과 그이의 친구로 보이는 녀석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연락처를 달라! 어디까지 가느냐? 등등등  어깨를 잡던 손이 점점 가슴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 당시 해병대원에게는 경찰조차도 단속을 피하던 시절이었기에 누구도 감히 봉변을 당하고 있는 그녀를 구원하려고 나서지 못하였다.

순간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와 그녀의 눈빛이 마주쳤는데 애처롭다.

"단테님! 제발 나를 구원해주세요!"

 

내게는 분명 그렇게 들렸기에 곧바로 다가가서 해병대원과 친구에게, 숙녀분에게 매너를 지킬 것을 정중히 요구하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홍콩 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시면 된다.

 

그때까지 매일 하루 두시간 이상을 체육관에서 파고 살았었는데 날마다 평행봉 500여개씩과,팔굽혀 펴기를 마지막 한손가락으로 스무개씩 할때까지 한 호흡에 500개씩을 할 무렵의 일이니까,,,

 

오죽하면 날 다루던 안기부 직원조차 2박3일간의 혈투에서 몸이 온전한 놈은 네가 처음이라고 했을까~

지금이야 적당하게 배도 나왔지만 그 무렵 남은 사진이 딱 한장 있는데 거의 전성기의 이소룡과 동급의 몸매다. (어차피 아고라도 곧 끝나는데 뭐,,,곧 인증 들어간다.)

 

두 녀석을 멋지게 해치운 후 그녀의 감사를 뒤로 하고서 하차를 하였는데 아뿔사! 이미 두 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다.

더 우스운 일은 그녀에게 연락처를 남기지도 어디에 사느냐고 묻지도 못했다는 일이다.

그럼 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다는 것이냐~

 

5월 봄, 모란이 피고 지도록 밤마다 열병을 앓았다.

천장만 바라보면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연락처 하나 받아 오지 못한게 한이 되었다.

 

그 해, 시골집에서 여름을 나기로 하였는데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던 날, 모친께서 군대 가기 전에 외삼촌에게 한번 인사를 다녀오라 말하신다.

평소 그리 살갑지는 않는 분이라서 거의 의무감으로 바나나 한 봉지를 사들고 버스를 타고서 외삼촌이 근무하는 Y읍으로 향했다. 

외삼촌은 Y읍에 있는 00은행의 정년을 코앞에 둔 지점장이었다. 

 

자동문이 된 요즘과는 달리 예전 은행들의 출입문을 열면 삐그덕하는 소리가 났다.

창구에 앉은 여직원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어서 오세요!"라며 인사를 하는데 순간 나는 얼음땡이 되고 말았다.

예전에 기차안에서 구해 주었던 나의 베아트리체가 유니폼을 입고 거기에 있었다. 

인연, 해후, 운명,,,,아니 숙명!

 

외삼촌도 그 사실을 들었는지 네가 그 사내였느냐며 파안대소를 하셨는데  외삼촌을 삼신할매로만 여겼기에  나중에 우리의 운명을 엇나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녀가 쉬는 주말마다 Y읍으로 내려가서 그녀의 집을 방문해서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만나거나

혹은 그녀가 내가 있는 K시로 올라왔는데 그렇게 그녀와 만나고 있으면서도 헤어지는 밤이면 열병을 앓는 것처럼 환영이 어른거렸다.

돌이켜보니 그게 내 첫사랑이었다.

 

꿈결같은 두어 달이 지날무렵 이상하게 그녀로부터의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을 했다.

결국 군대를 가던 날도 그녀는 오지 않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첫 휴가를 나오던 날, 결국 그녀가 말했다.

 

"의대생을 사귀고 있는데 그쪽에서 결혼을 서두른다고"

 

그래~~ 어쩌면 그게 현실적인지도 몰라~ 넌 의대생을 사귈만큼의 미모를 지니고 있고 미래가 보장된 의대생에 비하면 난 암울한 미래뿐인 한심한 입장인데 오죽했겠어!

 

제대를 한 후 "당신 둘은 제법 잘 어울려요!"라고 말했던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와의 결별을 알리기도 전에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시동을 걸고 출발하였다.

그녀의 여동생 M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꼬마 숙녀였는데 이제는 40 대의 장년이 되었고,집안 내력인지 언니와 마찬가지로 한눈에 드러날만큼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녀의 부모, 동생들 모두 상당히 인물이 좋았었다.

 

그녀의 친정 아버지는 고인이 되셨고 30여년만에 만난 그녀의 친정 엄마는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총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아~~ 우스님을 생전에 볼 수 있어서 반갑네요. 그때는 눈이 빛나는 미남자였지요"

 

복잡한 상속에 대한 얘기며 부동산 처분 등등 궁금해하는 몇가지 사항에 대해 답변을 드린 후 작별인사를 드렸는데 대문 앞에서 눈가에 이슬이 맻힌 그녀 모친의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생전에 뵙는건 이번이 마지막일꺼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M이 말한다. "아저씨! 저랑 차한잔 하고 가실래요?"

초등학생때 보았던지라 날 보면 항상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습관은 여전하다.

 

 

 

 -

곧 문을 닫는 아고라처럼

이제 내 첫사랑 그녀와의 인연의 실타래를 매듭지어야 할 시간이다.

찻집에서 M이 말하는 "언니의 첫사랑과 결혼"

 

외삼촌의 회사에서 그녀와 뜻밖의 재회를 하던 날, 외삼촌은 견우와 직녀가 만난 듯한 두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단다.  

열병을 앓는 조카를 보면서, 조카가 사랑하는 자신의 부하직원인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점점 쌀쌀해져 갔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외삼촌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과거 때문이었단다.

 

고민을 거듭하던 외삼촌이 내 모친에게 이러한 사실을 털어 놓게 되었고 결국 내 모친과 외삼촌 두 분은 D-데이를 잡아 그녀의 집에 방문하여 부모에게 잔인하게도"다신 내 아들과 조카에게 얼씬거리지 않을 것"을 다짐 받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한 그녀는 내키치 않는 남자와 이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제서야 모든 상황들이 정리가 되었다.

내 어머닌 수십 년간 감쪽같이 날 속여 온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모친은 단 한번도 그러한 사실을 내게 언급한 적이 없었던 것에 비하면 내 모친의 지나친 모성애에 대한 죄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러나 만약 내 자식들이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흔쾌히 승락을 할 수 있을까?.....

 

 맺어진 인연이 아니라 해도 그녀는 내가 죽는 날까지 안고 가야할 추억으로 남겨 두련다.

아고라처럼~

 

남녀의 인연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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